‘제로웨이스트(Zero Waste)’는 더 이상 유럽이나 북미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시아에서도 쓰레기 감축과 자원순환을 위한 실험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으며, 그 대표적 사례로 일본의 도쿠시마현 가미카쓰(上勝町) 마을이 있다. 인구 약 1,400명 규모의 이 작은 산골 마을은 2003년, 일본 최초이자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제로웨이스트 선언을 공식화한 지역으로 기록되었다. 선언 당시만 해도 지방 소멸과 쓰레기 처리비용 증가에 직면한 소외된 농촌이었지만, 현재는 전 세계 환경 전문가들의 관심을 받는 지속 가능한 마을로 탈바꿈했다.
가미카쓰는 45가지 분류의 쓰레기 배출 시스템, 소각장 없는 마을 운영, 주민 자율 참여 구조, 리사이클 센터와 호텔이 결합된 복합시설 등으로 유명하다. 단순히 쓰레기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구조’를 바꾸는 데 성공한 지역 모델로 인정받고 있다. 일본 내에서도 후쿠오카, 오사카 등 대도시들이 가미카쓰의 모델을 분석해 벤치마킹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한국과 대만 등 외국 지자체들의 정책 탐방도 활발하다.
이 글에서는 가미카쓰의 제로웨이스트 정책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이 모델이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을 살펴본다. 또한 한국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 어떤 실질적 시사점을 줄 수 있는지도 함께 짚어보며, 제로웨이스트 정책이 지역사회에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가미카쓰의 제로웨이스트 정책 구성과 실행 방식
가미카쓰의 정책은 한두 가지 시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방위적인 생활 시스템 변화로 설명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45가지 쓰레기 분류 시스템’이다. 마을 주민은 유리병, 금속, 의류, 종이, 비닐, 전자기기 등 모든 폐기물을 45종으로 분리해 배출해야 하며, 재활용이 불가능한 일부 품목은 마을이 직접 처리하지 않고 되돌려 보내는 구조를 갖는다. 이 분류 기준은 행정이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 아니라, 주민 워크숍과 논의를 통해 수립된 공동 기준이다.
이 과정에서 가미카쓰는 '소각장 없는 마을'이라는 대담한 정책도 실현했다. 기존에는 연간 1,000만 엔이 넘는 소각비용이 지출되었지만, 이를 감축하기 위해 마을은 쓰레기 자원화를 택했다. 모든 분리배출 품목은 마을 중심에 위치한 제로웨이스트 센터로 모이며, 이곳에는 재활용품 창고, 수선 공간, 중고 물품 교환소, 환경 교육관이 함께 마련되어 있다. 주민들은 이 공간에서 직접 폐기물을 분류하고, 필요한 물품은 다시 가져갈 수 있다. 쓰레기 감축은 물론 자원 순환, 비용 절감, 공동체 활성화까지 동시에 이뤄지는 구조다.
주목할 점은 이 시스템이 강제성이 아닌 자발적 참여로 운영된다는 점이다. 참여율은 마을 인구의 95% 이상이며, 실천력도 높다. 마을 측은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시민 감사의 날’, ‘감량 실적 공개’, ‘쓰레기 줄이기 챌린지’ 등 다양한 이벤트를 운영하며 주민 동기부여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청소년 대상 환경 교육은 초등학교부터 체계화되어 있고, 고령층은 센터 운영을 통해 일자리도 확보할 수 있는 구조로 설계되었다.
마을 정체성과 외부 확장성까지 고려한 정책 설계
가미카쓰의 제로웨이스트 정책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쓰레기 처리 효율을 넘어서, 지역 브랜드와 경제 모델까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대표 사례가 바로 2020년에 개관한 ‘호텔 WHY’다. 이 호텔은 제로웨이스트 센터 내에 위치한 숙박시설로, 방문객은 체크인과 동시에 제로웨이스트 활동을 체험할 수 있다. 숙박 요금의 일부는 마을 환경기금으로 적립되며, 방문객은 분리배출과 리사이클 워크숍에 참여할 수 있다.
이 호텔은 ‘쓰레기 없는 숙박 체험’이라는 콘셉트로 해외 언론에도 소개되었고, 제로웨이스트 정책이 마을 경제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전략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현재 가미카쓰는 연간 2만 명 이상의 외부 방문객이 찾는 마을로 성장했고, 마을 주민 중 일부는 환경 해설사, 가이드, 리사이클 창업자 등으로 활동하며 새로운 소득원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가미카쓰는 정책의 일관성과 유연성이라는 두 요소를 균형 있게 유지하고 있다. 정책은 분명하고 명확하지만, 주민 피드백에 따라 분리 기준이나 운영 방식을 유연하게 수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종이컵 수거 방식을 주민 요청에 따라 계절별로 변경하거나, 농한기에는 센터 운영 시간을 조정하는 식이다. 이러한 유연한 행정은 주민 중심 거버넌스 모델로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행정은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시스템을 작동시킨 것은 결국 주민의 실천과 공동체 문화였다. 가미카쓰는 ‘환경 정책’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꾼 마을이며, 이러한 전환은 일방적 통제나 캠페인으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정책의 성공은 ‘참여와 자율성’이 균형을 이뤘을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가미카쓰가 보여준 가능성과 한국의 과제
가미카쓰 사례는 단순한 성공 사례를 넘어, 제로웨이스트 정책이 작은 농촌에서도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실증 모델을 제시한다. 인구가 적고, 행정 자원이 부족한 지역일수록 오히려 주민 간 신뢰와 유대가 강하기 때문에 자율 기반 정책이 더 높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점도 시사적이다.
무엇보다 이 마을은 환경, 경제, 교육, 문화가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상호작용하는 통합적 모델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매우 모범적이다.
한국에서도 제로웨이스트 정책을 시도하는 지자체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은 ‘분리배출 강화’나 ‘포장재 감축’에 국한된 접근이 많다. 가미카쓰처럼 주민 참여형 거버넌스, 자원순환 기반 경제 모델, 생활 기반 교육 시스템이 함께 갖춰져야 비로소 정책의 지속 가능성이 확보된다. 특히, 주민 피로도를 고려한 운영 설계, 정책 수정 가능성을 열어두는 유연한 구조, 실행력 있는 거버넌스가 한국형 제로웨이스트 모델 구축에 필수다.
가미카쓰는 작은 마을이 거대한 사회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설계의 정교함과 실행의 진정성이다. 한국의 각 지역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제로웨이스트를 구현하되, 가미카쓰처럼 ‘정책이 문화로 바뀌는 과정’을 담아내는 모델을 고민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제로웨이스트는 일시적 캠페인이 아닌, 지속 가능한 지역 혁신 전략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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